■글 싣는 순서
[글로벌 반도체 전쟁(상)] 미국, 자체제작 선언 '반격의 서막'
[글로벌 반도체 전쟁(하)] 유럽·중·일 변화와 한국 생존전략
유럽연합(EU)은 미국에 앞서 반도체의 탈(脫)아시아를 선언했다. 이달 초 EU 집행위원회는 10년간 유럽의 디지털 산업 전환을 통해 유럽 내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2030년까지 EU의 글로벌 반도체 생산량 점유율을 최소 20%까지 끌어올리는 게 목표다.
EU는 자신들의 과학 기술력이 세계 최고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술 혁신이 산업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며 문제 제기를 계속해 왔다. 독일 스위스 프랑스 및 유럽 전역의 다른 국가에서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혁신 인재를 배출하고 있지만, 달성하고자 하는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는 우려다.
프랑스의 에콜 폴리테크닉(Ecole Polytechnique), 스위스의 ETH 취리히(ETH Zurich), 영국의 캠브리지(Cambridge)는 미국의 MIT 또는 스탠포드와 공학 및 수학 교육에서 세계 랭킹 1위를 다투고 있다. 또 파리-사클레이 대학교(Paris-Saclay University)는 세계대학 순위에서 세계 최고의 수학 학교인 프린스턴(Princeton)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자신들이 인공 지능, 양자 컴퓨팅 및 인간-기계 상호 작용 분야는 물론 생명 공학 분야의 건강 미래에 대한 개발을 주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U는 지난 20년 동안의 기술 혁명을 디지털과 데이터 경제의 출현으로 연결시키는 데 미국에 비해 뒤처졌다.
그 격차는 2008년 금융 위기와 그에 따른 경기침체 이후 더 벌어져 2020년까지 미국과 유럽 경제 사이에 5조9000억 달러의 GDP 격차로 이어졌다. 유럽의 기술과 산업의 연결성 부족이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기술 영광을 잃게 했다는 진단이다. 심지어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 등 아시아 국가에 비해 뒤떨어졌다는 게 지식인들의 분석이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유럽은 이미 2019년 말 ‘EU 공동 관심분야 주요 프로젝트’에서 향후 수년 이내에 10나노미터 이하의 초미세 공정 공장을 EU 권역에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또한 ‘디지털 주권 확보’를 명분으로 독일과 프랑스 주도로 최대 500억 유로에 달하는 첨단 반도체 제조기술 발전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자동차용 반도체 공급 부족에 따른 세계 1위 완성차 폭스바겐의 일부 공장 가동 중단은 더욱 반도체에 대한 주권 확보 필요성을 높였다.
EU는 최근 다양한 지원을 통해 2030년까지 반도체 제조 생산량을 세계 시장의 20%로 현재보다 두 배 늘리는 보다 진전된 계획을 발표했다. EU는 2030년까지 모든 가정에 5G 액세스 및 기가비트 인터넷 연결을 추진한다. 모든 회원국이 ‘모든 주요 공공 서비스’를 온라인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유럽의 최신 계획은 반도체 및 AI와 같은 첨단 기술에 대한 자립을 높이기 위해 2030년까지 150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주요 목표는 전 세계 반도체 가치를 기준으로 작년 10%에서 20% 이상을 생산하는 것이다.
더 많은 반도체를 생산하려는 EU의 야망은 대단하다. 전염병과 미중 무역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중단이 자신들의 산업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반도체의 안정적인 공급을 유지하는 것은 시급한 관심사다. 석유와 같은 핵심 자원 흐름과 마찬가지로 첨단 반도체에 대한 접근은 많은 산업 및 제품에 필수적이다. 현재 대부분 생산이 아시아, 특히 대만과 한국에 집중되고 있는 점을 반드시 시정하겠다는 입장이다.
EU 디지털 시대에 적합한 유럽위원회 마그레데 베스더 수석 부사장은 최근 ‘디지털 컴퍼스(Digital Compass)’ 계획과 관련해서 “핵심 기술에 관해 다른 사람이나 국가, 기업들에게 덜 의존 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하면서 반도체 공급망 확보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바 있다.
현재 유럽의 주요 반도체 회사로는 네덜란드의 ASML, 독일의 인피니온, 네덜란드의 NXP 등이 있다.
◇중국과 일본의 움직임은?
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중국은 반도체 굴기를 위해 지난 20년 동안 500억 달러에 달하는 정부 보조금을 지원했다. 이는 인접국인 대만 기업이 받는 금액의 100배에 해당한다. 중국 국내 기업들은 세금 면제, 무료 토지, 우대 대출 및 조달 인센티브를 받고 있다. 2019년 중국 반도체 수출액은 전년 대비 20% 증가한 1010억 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주로 중저가다.
중국의 반도체 수입은 2019년에 3000억 달러 이상으로 최대 수입 품목이었다. 중국은 반도체의 30%만 국내에서 공급하고 있다. 그간 천문학적 투자로 중국은 반도체 설계에서 큰 진전을 이루었다. 화웨이는 5G 장비와 플래그십 스마트폰 반도체 기린(Kirin)을 성공적으로 개발했다.
그러나 중국은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데 한계가 있다. 화웨이도 기린을 자체 설계까지는 했지만 제조는 대만 TSMC에 맡겼다. 중국과 대만 파운드리 기술 격차는 극명하다.
TSMC는 고급 5나노 반도체를 생산하는 반면 중국 최대 반도체 회사인 SMIC는 최근에야 반도체 양산에 필요한 14나노 제조 기술을 획득했다. 중국의 반도체 제조 능력은 업계 선두보다 최소 2세대(7~10년) 뒤떨어져 있다.
이에 중국 공산당(CCP)은 최근 14차 5개년 계획(2021~2025)에서 반도체 생산에서 자율성을 강화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는 미국 기술이 포함된 반도체의 중국 공급을 제한하는 미국의 제재에 대한 대응이다.
미중 무역전쟁은 중국 지도부가 더 이상 반도체를 수입에 의존할 수 없으며, 4차 산업 핵심 소재인 반도체에 핵심 기술을 더 개발하고 기술 도약을 추구하는 것이 중국에 사활이 걸린 과제임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 정부는 “4차 산업 혁명 가속화로 수요가 크게 늘고 있는 첨단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긴급한 과제”로 진단하고 최근 해외에 의존해온 첨단 반도체의 국내 생산 체제 구축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첨단 반도체의 국내 생산 체제 정비를 위해 민관이 참여하는 공동 사업체를 신설했다.
또한 보다 체계적 추진을 위해 반도체·디지털 인프라 등에 관한 새로운 산업정책을 탐구하는 '반도체·디지털 산업전략 검토 회의'를 운영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는 민관 협력을 기반으로 첨단 반도체 개발 체제를 구축해 2025년까지 국내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일본은 PC용 등 기존 반도체를 생산하는 거점이 다수 있지만 스마트폰이나 자동차 등 각종 디지털 기기의 두뇌 역할을 하는 첨단 반도체 분야는 미국, 유럽, 한국, 대만 기업에 크게 뒤져 있다.
한편 일본 정부는 조만간 쓰쿠바시에 첨단 반도체 조립 공정에 관한 연구개발 거점을 신설할 예정이다. 대만 반도체업체 TSMC 지원을 위해 보조금도 지급할 방침이다.
◇한국 산업에 미칠 영향은?
미 반도체협회는 전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가 2021년 약 4900억 달러에서 2030년에는 약 6500억 달러로 추산하고 있다.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 천문학적 규모로 신규 반도체 공장을 증설할 경우 일정한 시장 규모를 두고 서로 나눠먹는 과정에 출혈 경쟁이 불가피하고 결국 반도체 시장 전체 판도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대만과 한국의 대응은?
전문가들은 실현 가능성은 차차하고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미국, 유럽, 중국, 일본 등이 주장하는 반도체 주권을 주장하는 논리를 조금이라도 불식시켜야 한다고 제언하고 있다. 반도체 동맹으로 반도체 공급 관련 위기감과 의구심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를 고수하고 있는 대만 TSMC는 미국 민관의 반도체 주권 강화에 큰 위기의식을 느끼고 미국을 달래기 위해 ‘고객사와 경쟁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모토처럼 적극적으로 미국 현지 투자에 나서고 있다. 천문학적 신규 투자나 외국 반도체 업체에 대한 규제 입법화를 어떻게든 완화하려면 미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대만이 친구임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움직이고 있다.
대만 정부는 미국과 유럽의 자동차업계는 물론 휴대폰 제조사 등의 반도체 공급 차질 우려를 불식하려고 쑤전창 행정원장(총리격)이 직접 나서 “공급에 총력을 다하겠다”고 수차례 밝힌 바 있다. 우방국으로서 친구가 피해를 보지 않도록 가뭄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TSMC도 최근 미국 내 공장 투자 규모를 기존보다 3배 확대했다. 미국과의 ‘반도체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피닉스시에 건설하는 신규 단지는 6개 반도체 공장을 포함하는 ‘메가 사이트’(mega site)로 총 건설비용은 기존 발표한 120억 달러(약 13조원)와 비교해 3배에 달하는 360억 달러(약 41조원) 수준이라고 한다. 이는 삼성전자가 텍사스주 등 미국 신규 공장을 짓기 위해 검토 중인 170억 달러(약 19조원)와 비교해 2배 규모다.
이에 미국 측도 화끈하게 응답하고 있다. 애리조나 주정부는 TSMC 반도체 공장 용수 공급을 보장하고 추가로 2억500만 달러(약 2300억 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한편 삼성도 미국과 대만의 움직임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총수 부재라는 최악의 위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미국 텍사스 오스틴시와 19조 원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 증설 협의를 이어가고 있다. 반도체 동맹에서 미국과 유럽의 우군임을 보이려는 노력으로 보여진다.
미국과 유럽, 중국 등의 우려를 달래기 위해 현지 투자 확대 외 다른 방안도 강구할 수 있다. 우선 미 월가 일부 반도체 전문가들은 미국이 천문학적 자금을 투입해도 자체적으로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다고 전망한다. 시장에는 낙관론자와 비관론자가 있지만 아주 어려운 작업으로 보는 여론이 분명 존재하고 있다.
한 반도체 전문가는 “중국이 보여주듯이 반도체에 돈을 던진다고 해서 성공을 보장할 수는 없다”면서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과 유럽은 반도체 회사의 수가 줄어들고 있으며, 또한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는 아시아로부터 리더십을 확보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럽의 반도체 전문가 일각에서도 “반도체 제조가 매우 고가의 사업으로 천문학적 돈을 투입하기 보다는 유럽 기업의 주요 성공에서 보듯 반도체 자체가 아닌 이 공정에 사용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라며 “예를 들어, 네덜란드 ASML은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포토 리소그래피 기계로 알려진 장비 생산에서 높은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면서 “특화된 분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분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 제조 발전은 하룻밤 사이에 개발할 수 없는 기술과 전문성을 요구한다. 중국의 경우도 반도체 국산화 전략을 재고할 수 있도록 국제 여론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공급망을 현지화 하면 중국의 외국 기술 의존도가 줄어들 수 있지만 비용이 많이 들고 상업적으로 실행 불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
반도체 분야에서 대만이 선두가 된 전략을 알아야 한다. 대만은 전체 공급망이 아닌 파운드리 분야에만 역량을 집중했다. 중국이 최첨단 분야 제조 기술에 경쟁자를 따라 잡으려면 적어도 7~10년이 소요된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판단이다. 그 기간 동안 대만은 물론 삼성도 움직인다. 중국이 꿈에 그리는 3나도 미터 생산 공정을 TSMC는 이미 시도하고 있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지금과 같은 국제 분업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 상생의 길이라고 지적한다. 반도체 주권 선언 국가들에 이 같은 전문가의 탁견을 잘 알리는 것도 지금 우리가 경쟁력 강화 노력과 함께 해야 할 올바른 대처법이다.
박정한 기자